김민석 집권당 체제 출범, 호남 민심이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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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또또링3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6-08-19 03:24본문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7일 52.08%의 득표율로 당선된 데에는 민주당 주요 지지 기반인 호남 표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전 지역에서 정청래 의원과 박빙의 대결을 벌였던 김 대표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정 의원을 두 자릿수의 큰 격차로 앞섰다. 호남이 집권 1년 차인 이재명 정부 뒷받침을 강조한 김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대표는 이날 대전 유성구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민주당 8·17 전당대회 결과 권리당원 55.94%, 전국 대의원 66.69%, 일반 국민여론조사에서 49.30%를 얻어 총합산 54.08%(대구·경북·경남 5% 가중치 반영)로 승리했다. 권리당원 및 대의원은 70%, 일반여론조사는 30%의 비율로 반영됐다.
김 대표는 수락 연설에서 이재명 정부 국정운영 지원을 주요 과제로 언급했다. 김 대표는 “당은 이재명 대통령과 국민 주권 정부의 성공을 위해 뛸 것이다. 그 성공이 국민의 성공이기 때문”이라며 “그 성공을 위해 토론하고, 직언하고, 방패가 되는 다수 정당, 민주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호투표까지 가서야 가까스로 확정된 김 대표의 당선은 ‘호남의 선택’으로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대표는 호남을 제외한 다른 전 지역에서는 정 의원과 한 자릿수밖에 안 되는 차이를 보였지만, 호남에서 24.89%포인트로 정 의원을 크게 앞서면서 비로소 승기를 잡았다. 전국적으로 박빙인데 호남에서만 한 후보에 크게 쏠림이 있는 상황은 민주당 역대 전당대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독특한 상황이기도 하다.
당내에서는 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이 이재명 정부 초대 총리로 당·청 관계 안정을 줄곧 강조한 김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분석했다.
한 재선 의원은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근본적으로 이재명 정부 성공을 위해서는 지도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라며 “호남은 늘 누가 되느냐보다, 우리 정부가, 민주당이 승리하는 길을 택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다른 재선 의원도 통화에서 “지금 서로 갈라치기 하고 싸우고 있는데, 1년 된 정권을 흔들어선 안 된다고 하는 메시지를 호남이 강하게 줬다”며 “당 지도부 모양이 갖춰지면 (갈등은) 조금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적 분당 상태’라는 말이 나올 만큼 내부 갈등이 심하게 드러난 전당대회였던 만큼, 호남이 한쪽에 분명하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한 중진 의원은 통화에서 “호남은 예전에 국민의당으로 민주당이 분열할 때도 기폭제가 됐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초선 의원도 “당원들이 혼란보다는 김민석이 되게 해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자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의 역점 사업인 호남 메가 프로젝트도 김 대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중진 의원은 “호남의 경제적인 성장에 대한 요구가 같이 내재한 투표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도권 지역 한 초선 의원은 통화에서 “정 후보가 되면 당이 갈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과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가 두 사람 간 편차를 더 벌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첫 시행된 선호투표제 역시 김 대표의 승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순위로 지지한 후보자가 3위로 결선에 오르지 못할 경우 3위 후보자의 2순위 표를 결선에 오른 후보자에게 몰아주는 선호투표의 구조상, 송영길 의원을 지지한 이들이 김 대표를 지지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이번 여름 부산에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렸다. 한국은 유네스코 ‘세계의 기억’에 등록된 문화유산이 많은데, 그중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이다. 국립실록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 공동으로 ‘만세(萬世)에 전하노니’라는 실록 전시회를 열었고,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 전시는 국가기록원(태백산본), 규장각(정족산본), 국립실록박물관(오대산본)에 보관된 실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전시회와 함께 동아시아 실록의 전통을 비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는데, 한국·중국·베트남의 전문 학자들이 각국의 역사 편찬 경험에 대해 흥미로운 발표를 해주었다.
이번 칼럼에서는 기조강연자로 참석한 경험을 살려서, 실록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한국·중국·베트남에서 각각 다르게 펼쳐졌던 실록의 역사적 양상과 숙명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왕조 위의 역사
전시회 제목에는 영원하다는 의미의 ‘만세’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만세는 일세(一世)와 대비되는 말이다. 일세는 한 세대(A generation), 곧 20~30년에 해당하지만, 만세와 대비될 때는 당대(contemporary)를 뜻한다. 그래서 관용적으로 ‘언론은 일세의 공론, 역사는 만세의 공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동시대의 공론을 주도하는 것이 언론이었다면, 역사는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공론으로 남는다고 대체로 생각했다.
내가 조선실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진 의문 중 하나는, 보지도 못할 역사를 왜 남기나 하는 점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례를 확인할 때 사관을 보내 관련 부분만 베껴오도록 했을 뿐, 사관 외에는 국왕을 비롯해 그 누구도 실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록은 기약 없이 ‘후대를 위해’ 남겨놓은 역사였다. 결국 그 ‘후대’란 해당 왕조 이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조나 국가 외에 문명, 혹은 왕조를 넘어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관점이자 영역이 바로 역사였다. 그런 까닭에 왕조 시대에, 왕조 이후를 언급하는 모든 행위는 반역으로 몰릴 수 있었지만, 오직 ‘역사의 이름으로’만 왕조 이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할 것이다.
‘맹자’와 ‘로마서’
역사 및 그 역사를 살았던 수많은 인간의 삶에 대해,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은 서로 다르게 접근하였다. 다음과 같은 말을 비교하면 두 문명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① “세상의 질서와 원칙이 쇠퇴하면서, 거짓된 말과 몹쓸 행동이 생겨났다.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끔찍한 경우도 있었다. 공자가 걱정되어 역사서 <춘추>를 지었는데… <춘추>가 완성되자 세상을 어지럽힌 무뢰배들이 벌벌 떨었다.” - <맹자(孟子)>
②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신약성경 <로마서>
두 고전의 말에는 기록과 평가가 공통으로 언급되지만 그 주체는 다르다. <맹자>는 역사의 평가가 두렵게 한다고 했고, <로마서>는 하나님이 진노하고 심판한다고 했다. 종종 나라에 죄를 지은 자들이 자기변명 삼아 하는 ‘역사가 나를 평가할 것’이라는 망발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어법은 <로마서>보다 <맹자>의 문화 속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라이프니츠의 놀라움
유럽 17세기 후반, 작센(현 독일 지역) 출신 라이프니츠는 그리말디와 부베 신부로부터 중국 소식을 알게 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 청나라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들은 바에 따라, “위대한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 왕은, 유럽 봉건제의 왕들이 신분제 의회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데 비해 역사의 평가를 더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역사 편찬자가 자신의 치세를 기록하고 비밀 서고에 보관할 때를 생각하여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는 행위를 조심하였다”고 자신의 저서 <최근 중국 소식>에 적어두었다. 기독교 문명에 살던 그는 군주가 신이 아닌 역사를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 놀랐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康熙帝) 성조(1662~1722)였다. 중국식 이름이 탕약망(湯若望)이었던 아담 샬 등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오랜 역사 편찬 전통의 일부만 들었을 뿐이다. 당대의 역사를 남기는 실록은 당 태종 때 편찬이 시작되어 조선과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팔려나간 실록
한데 라이프니츠가 역사의 기록에 그토록 예민했다고 말한 강희제 때 청나라의 실록이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청나라 실록에 대한 발표자였던 시앙쉬안 교수에 따르면, 1763년 나가사키를 통해 강희제 때 편찬되었던 3대 순치제의 ‘세조실록’이 일본으로 팔려 갔다는 것이다.
세조실록만이 아니었다. 후금(後金)을 일으킨 누르하치의 ‘태조실록’,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고 청나라를 세운 태종의 실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청나라의 초기 세 왕대(淸三朝)’ 실록이 에도로 밀반출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실록 관리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출된 청나라 실록은 상선이 싣고 온 물건 목록에서도 확인되지만, 이들 실록을 내각문고의 전신인 막부문고에 보관했다는 당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세 실록은 교토대, 국회도서관, 동양문고, 도쿄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에도시대 학자들은 이 실록을 주제별로 분류하거나, 내용을 요약한 ‘사략(事略)’ 형태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전히 청초 세 실록이 어떻게 유출되어 일본으로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단서조차 알 수 없다. 망한 왕조의 실록이라면 자연 노출, 공개되었을 것이지만 한창 왕조의 긴장감이 높았을 강희~건륭 연간에, 그것도 외국으로 유출됐으니, 이 미스터리는 추적할 만한 연구 주제일 것이다.
열대 베트남의 ‘식록(寔錄)’
명나라 실록은 황제가 볼 수 있는 어람용 실록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관 외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조선실록과 달랐다. 실록 편찬 뒤 명나라는 사초를 태웠고, 조선에서는 세검정 차일암에서 물에 씻었다. 물로 씻든 불로 태우든 이 행위는 한 시대를 정리하는 방법이자 예식이었다. 청실록은 만(滿)·몽(蒙)·한(漢) 세 언어로 편찬되었다. 정본 4부와 부본 1부가 제작되었으니, 조선처럼 5부 간행한 것이다.
‘실록’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에서도 발견된다. 베트남의 실록으로 완(阮·1802~1945) 왕조의 ‘대남식록(大南寔錄)’이 있는데, 식(寔)은 실(實)과 같은 글자이다. 성균관과 문묘가 있던 베트남이었으므로 실록도 편찬했으리라 짐작은 했었고 대략은 알고 있었는데, 레 투이 린 박사는 조선실록과 같은 실록을 베트남에서도 편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남식록의 경우, 전편은 지나간 왕조의 역사이고, 정편만 완 왕조의 실록이었다. 완 왕조 이전에는 고려~조선실록과 같은 체계적인 역사 편찬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아마 열대의 고온다습한 기후가 종이기록을 보관하는 데 부적합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추정해본다.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를 위해서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우선일 듯해 레 박사에게 물어보니 베트남 내에서 대남식록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학자가 이제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한자를 바탕으로 한 쯔놈 문자를 사용해왔는데, 프랑스 지배 아래 1885년 이후 로마자 기반의 쯔꾸옥응으를 사용했다. 이것이 과거 역사에 대한 문맹을 초래한 셈이었다.
명실록과 청실록은 현재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대남식록은 일부 놈파운데이션(Nom Foundation)을 통해 이미지가 제공되고 있지만, 검색 시스템은 제공되지 않는다. 어떤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그 사회의 역사와 경험을 아는 것이 첫걸음이다. 한국·중국·베트남의 실록 연구가 더 깊어지고, 그에 따라 서로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평화와 우호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讀史管見: 역사를 읽는 소박한 눈
전남광주 국립의과대학 신설을 추진하는 목포대와 순천대가 끝내 단일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각각 신청서를 내기로 했다. 정부가 요구한 통합 계획서 제출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의대 신설도 다시 불투명해졌다.
18일 전남광주시 등에 따르면 목포대와 순천대는 각각 의대 신설 관련 자료를 시에 제출하기로 했다. 시가 정부에 낼 추진계획서를 검토하기 위해 이날까지 자료 제출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앞서 정부는 지난 6일 전남광주시와 두 대학에 통합을 전제로 한 의대 신설 추진계획서를 오는 20일까지 제출하도록 했다. 의대와 대학병원 위치를 합의하고 교육시설·교육병원·교원 확보 방안 등을 함께 마련하도록 했다.
하지만 두 대학은 단일안을 만들지 못했다. 이날 제출하는 자료에는 의대 신설 필요성과 신청 정원, 지자체 지원계획 등 일부 항목만 담겼다. 의대 운영과 교육시설, 교원 확보 등 두 대학의 합의가 필요한 내용은 빠졌다. 두 대학은 지난달부터 여러 차례 협상했지만, 의대와 대학본부 위치 등을 놓고 접점을 찾지 못했다. 지난 14일에는 민형배 시장과 두 대학 총장이 만나 막판 조율에 나섰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이번 사태는 그간 예견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목포대와 순천대는 2024년 11월 의대 신설을 전제로 대학 통합에 합의했지만 이후 의대와 대학본부 위치 등을 놓고 충돌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전남광주시는 합의 불발에 대비한 별도 방안을 미리 마련하지 못했다.
한 지역 정가 관계자는 “수년간 갈등이 반복됐는데도 대안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두 대학과 행정 모두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며 “의대 신설은 대학의 유치전이 아니라 주민 의료권이 걸린 문제”라고 지적했다.
막판 합의 가능성도 높지 않다. 순천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주민 등 200여명은 이날 오전 서울에서 순천대 의대와 전남 동부권 대학병원 설립을 촉구하는 상경 집회를 열었다. 김문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현장에서 삭발하며 순천대 의대 유치를 요구했다.
전남광주가 통합안을 내지 못하면서 의대 신설 기회를 다른 지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2030학년도 신설 국립의대 정원 100명을 배정할 후보지로 전남광주와 경북을 선정했다. 경북은 국립경국대를 중심으로 단일 추진계획서를 준비하고 있다.
전남광주시는 20일까지 지자체가 작성할 수 있는 내용을 우선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특히 두 대학의 단독 신청을 허용해 달라고 교육부와 협의할 방침이다. 교육부가 두 대학 가운데 한 곳을 직접 선정하거나 전남광주시에 대학 선정 권한을 주도록 하는 방안도 함께 건의할 계획이다.
전남광주시 관계자는 “교육부가 어떤 판단을 할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며 “지역 의대 신설이 무산되지 않도록 끝까지 설득하고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전 지역에서 정청래 의원과 박빙의 대결을 벌였던 김 대표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정 의원을 두 자릿수의 큰 격차로 앞섰다. 호남이 집권 1년 차인 이재명 정부 뒷받침을 강조한 김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대표는 이날 대전 유성구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민주당 8·17 전당대회 결과 권리당원 55.94%, 전국 대의원 66.69%, 일반 국민여론조사에서 49.30%를 얻어 총합산 54.08%(대구·경북·경남 5% 가중치 반영)로 승리했다. 권리당원 및 대의원은 70%, 일반여론조사는 30%의 비율로 반영됐다.
김 대표는 수락 연설에서 이재명 정부 국정운영 지원을 주요 과제로 언급했다. 김 대표는 “당은 이재명 대통령과 국민 주권 정부의 성공을 위해 뛸 것이다. 그 성공이 국민의 성공이기 때문”이라며 “그 성공을 위해 토론하고, 직언하고, 방패가 되는 다수 정당, 민주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호투표까지 가서야 가까스로 확정된 김 대표의 당선은 ‘호남의 선택’으로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대표는 호남을 제외한 다른 전 지역에서는 정 의원과 한 자릿수밖에 안 되는 차이를 보였지만, 호남에서 24.89%포인트로 정 의원을 크게 앞서면서 비로소 승기를 잡았다. 전국적으로 박빙인데 호남에서만 한 후보에 크게 쏠림이 있는 상황은 민주당 역대 전당대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독특한 상황이기도 하다.
당내에서는 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이 이재명 정부 초대 총리로 당·청 관계 안정을 줄곧 강조한 김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분석했다.
한 재선 의원은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근본적으로 이재명 정부 성공을 위해서는 지도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라며 “호남은 늘 누가 되느냐보다, 우리 정부가, 민주당이 승리하는 길을 택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다른 재선 의원도 통화에서 “지금 서로 갈라치기 하고 싸우고 있는데, 1년 된 정권을 흔들어선 안 된다고 하는 메시지를 호남이 강하게 줬다”며 “당 지도부 모양이 갖춰지면 (갈등은) 조금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적 분당 상태’라는 말이 나올 만큼 내부 갈등이 심하게 드러난 전당대회였던 만큼, 호남이 한쪽에 분명하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한 중진 의원은 통화에서 “호남은 예전에 국민의당으로 민주당이 분열할 때도 기폭제가 됐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초선 의원도 “당원들이 혼란보다는 김민석이 되게 해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자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의 역점 사업인 호남 메가 프로젝트도 김 대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중진 의원은 “호남의 경제적인 성장에 대한 요구가 같이 내재한 투표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도권 지역 한 초선 의원은 통화에서 “정 후보가 되면 당이 갈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과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가 두 사람 간 편차를 더 벌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첫 시행된 선호투표제 역시 김 대표의 승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순위로 지지한 후보자가 3위로 결선에 오르지 못할 경우 3위 후보자의 2순위 표를 결선에 오른 후보자에게 몰아주는 선호투표의 구조상, 송영길 의원을 지지한 이들이 김 대표를 지지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이번 여름 부산에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렸다. 한국은 유네스코 ‘세계의 기억’에 등록된 문화유산이 많은데, 그중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이다. 국립실록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 공동으로 ‘만세(萬世)에 전하노니’라는 실록 전시회를 열었고,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 전시는 국가기록원(태백산본), 규장각(정족산본), 국립실록박물관(오대산본)에 보관된 실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전시회와 함께 동아시아 실록의 전통을 비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는데, 한국·중국·베트남의 전문 학자들이 각국의 역사 편찬 경험에 대해 흥미로운 발표를 해주었다.
이번 칼럼에서는 기조강연자로 참석한 경험을 살려서, 실록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한국·중국·베트남에서 각각 다르게 펼쳐졌던 실록의 역사적 양상과 숙명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왕조 위의 역사
전시회 제목에는 영원하다는 의미의 ‘만세’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만세는 일세(一世)와 대비되는 말이다. 일세는 한 세대(A generation), 곧 20~30년에 해당하지만, 만세와 대비될 때는 당대(contemporary)를 뜻한다. 그래서 관용적으로 ‘언론은 일세의 공론, 역사는 만세의 공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동시대의 공론을 주도하는 것이 언론이었다면, 역사는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공론으로 남는다고 대체로 생각했다.
내가 조선실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진 의문 중 하나는, 보지도 못할 역사를 왜 남기나 하는 점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례를 확인할 때 사관을 보내 관련 부분만 베껴오도록 했을 뿐, 사관 외에는 국왕을 비롯해 그 누구도 실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록은 기약 없이 ‘후대를 위해’ 남겨놓은 역사였다. 결국 그 ‘후대’란 해당 왕조 이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조나 국가 외에 문명, 혹은 왕조를 넘어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관점이자 영역이 바로 역사였다. 그런 까닭에 왕조 시대에, 왕조 이후를 언급하는 모든 행위는 반역으로 몰릴 수 있었지만, 오직 ‘역사의 이름으로’만 왕조 이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할 것이다.
‘맹자’와 ‘로마서’
역사 및 그 역사를 살았던 수많은 인간의 삶에 대해,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은 서로 다르게 접근하였다. 다음과 같은 말을 비교하면 두 문명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① “세상의 질서와 원칙이 쇠퇴하면서, 거짓된 말과 몹쓸 행동이 생겨났다.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끔찍한 경우도 있었다. 공자가 걱정되어 역사서 <춘추>를 지었는데… <춘추>가 완성되자 세상을 어지럽힌 무뢰배들이 벌벌 떨었다.” - <맹자(孟子)>
②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신약성경 <로마서>
두 고전의 말에는 기록과 평가가 공통으로 언급되지만 그 주체는 다르다. <맹자>는 역사의 평가가 두렵게 한다고 했고, <로마서>는 하나님이 진노하고 심판한다고 했다. 종종 나라에 죄를 지은 자들이 자기변명 삼아 하는 ‘역사가 나를 평가할 것’이라는 망발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어법은 <로마서>보다 <맹자>의 문화 속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라이프니츠의 놀라움
유럽 17세기 후반, 작센(현 독일 지역) 출신 라이프니츠는 그리말디와 부베 신부로부터 중국 소식을 알게 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 청나라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들은 바에 따라, “위대한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 왕은, 유럽 봉건제의 왕들이 신분제 의회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데 비해 역사의 평가를 더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역사 편찬자가 자신의 치세를 기록하고 비밀 서고에 보관할 때를 생각하여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는 행위를 조심하였다”고 자신의 저서 <최근 중국 소식>에 적어두었다. 기독교 문명에 살던 그는 군주가 신이 아닌 역사를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 놀랐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康熙帝) 성조(1662~1722)였다. 중국식 이름이 탕약망(湯若望)이었던 아담 샬 등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오랜 역사 편찬 전통의 일부만 들었을 뿐이다. 당대의 역사를 남기는 실록은 당 태종 때 편찬이 시작되어 조선과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팔려나간 실록
한데 라이프니츠가 역사의 기록에 그토록 예민했다고 말한 강희제 때 청나라의 실록이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청나라 실록에 대한 발표자였던 시앙쉬안 교수에 따르면, 1763년 나가사키를 통해 강희제 때 편찬되었던 3대 순치제의 ‘세조실록’이 일본으로 팔려 갔다는 것이다.
세조실록만이 아니었다. 후금(後金)을 일으킨 누르하치의 ‘태조실록’,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고 청나라를 세운 태종의 실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청나라의 초기 세 왕대(淸三朝)’ 실록이 에도로 밀반출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실록 관리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출된 청나라 실록은 상선이 싣고 온 물건 목록에서도 확인되지만, 이들 실록을 내각문고의 전신인 막부문고에 보관했다는 당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세 실록은 교토대, 국회도서관, 동양문고, 도쿄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에도시대 학자들은 이 실록을 주제별로 분류하거나, 내용을 요약한 ‘사략(事略)’ 형태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전히 청초 세 실록이 어떻게 유출되어 일본으로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단서조차 알 수 없다. 망한 왕조의 실록이라면 자연 노출, 공개되었을 것이지만 한창 왕조의 긴장감이 높았을 강희~건륭 연간에, 그것도 외국으로 유출됐으니, 이 미스터리는 추적할 만한 연구 주제일 것이다.
열대 베트남의 ‘식록(寔錄)’
명나라 실록은 황제가 볼 수 있는 어람용 실록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관 외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조선실록과 달랐다. 실록 편찬 뒤 명나라는 사초를 태웠고, 조선에서는 세검정 차일암에서 물에 씻었다. 물로 씻든 불로 태우든 이 행위는 한 시대를 정리하는 방법이자 예식이었다. 청실록은 만(滿)·몽(蒙)·한(漢) 세 언어로 편찬되었다. 정본 4부와 부본 1부가 제작되었으니, 조선처럼 5부 간행한 것이다.
‘실록’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에서도 발견된다. 베트남의 실록으로 완(阮·1802~1945) 왕조의 ‘대남식록(大南寔錄)’이 있는데, 식(寔)은 실(實)과 같은 글자이다. 성균관과 문묘가 있던 베트남이었으므로 실록도 편찬했으리라 짐작은 했었고 대략은 알고 있었는데, 레 투이 린 박사는 조선실록과 같은 실록을 베트남에서도 편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남식록의 경우, 전편은 지나간 왕조의 역사이고, 정편만 완 왕조의 실록이었다. 완 왕조 이전에는 고려~조선실록과 같은 체계적인 역사 편찬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아마 열대의 고온다습한 기후가 종이기록을 보관하는 데 부적합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추정해본다.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를 위해서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우선일 듯해 레 박사에게 물어보니 베트남 내에서 대남식록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학자가 이제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한자를 바탕으로 한 쯔놈 문자를 사용해왔는데, 프랑스 지배 아래 1885년 이후 로마자 기반의 쯔꾸옥응으를 사용했다. 이것이 과거 역사에 대한 문맹을 초래한 셈이었다.
명실록과 청실록은 현재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대남식록은 일부 놈파운데이션(Nom Foundation)을 통해 이미지가 제공되고 있지만, 검색 시스템은 제공되지 않는다. 어떤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그 사회의 역사와 경험을 아는 것이 첫걸음이다. 한국·중국·베트남의 실록 연구가 더 깊어지고, 그에 따라 서로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평화와 우호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讀史管見: 역사를 읽는 소박한 눈
전남광주 국립의과대학 신설을 추진하는 목포대와 순천대가 끝내 단일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각각 신청서를 내기로 했다. 정부가 요구한 통합 계획서 제출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의대 신설도 다시 불투명해졌다.
18일 전남광주시 등에 따르면 목포대와 순천대는 각각 의대 신설 관련 자료를 시에 제출하기로 했다. 시가 정부에 낼 추진계획서를 검토하기 위해 이날까지 자료 제출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앞서 정부는 지난 6일 전남광주시와 두 대학에 통합을 전제로 한 의대 신설 추진계획서를 오는 20일까지 제출하도록 했다. 의대와 대학병원 위치를 합의하고 교육시설·교육병원·교원 확보 방안 등을 함께 마련하도록 했다.
하지만 두 대학은 단일안을 만들지 못했다. 이날 제출하는 자료에는 의대 신설 필요성과 신청 정원, 지자체 지원계획 등 일부 항목만 담겼다. 의대 운영과 교육시설, 교원 확보 등 두 대학의 합의가 필요한 내용은 빠졌다. 두 대학은 지난달부터 여러 차례 협상했지만, 의대와 대학본부 위치 등을 놓고 접점을 찾지 못했다. 지난 14일에는 민형배 시장과 두 대학 총장이 만나 막판 조율에 나섰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이번 사태는 그간 예견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목포대와 순천대는 2024년 11월 의대 신설을 전제로 대학 통합에 합의했지만 이후 의대와 대학본부 위치 등을 놓고 충돌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전남광주시는 합의 불발에 대비한 별도 방안을 미리 마련하지 못했다.
한 지역 정가 관계자는 “수년간 갈등이 반복됐는데도 대안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두 대학과 행정 모두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며 “의대 신설은 대학의 유치전이 아니라 주민 의료권이 걸린 문제”라고 지적했다.
막판 합의 가능성도 높지 않다. 순천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주민 등 200여명은 이날 오전 서울에서 순천대 의대와 전남 동부권 대학병원 설립을 촉구하는 상경 집회를 열었다. 김문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현장에서 삭발하며 순천대 의대 유치를 요구했다.
전남광주가 통합안을 내지 못하면서 의대 신설 기회를 다른 지역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2030학년도 신설 국립의대 정원 100명을 배정할 후보지로 전남광주와 경북을 선정했다. 경북은 국립경국대를 중심으로 단일 추진계획서를 준비하고 있다.
전남광주시는 20일까지 지자체가 작성할 수 있는 내용을 우선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특히 두 대학의 단독 신청을 허용해 달라고 교육부와 협의할 방침이다. 교육부가 두 대학 가운데 한 곳을 직접 선정하거나 전남광주시에 대학 선정 권한을 주도록 하는 방안도 함께 건의할 계획이다.
전남광주시 관계자는 “교육부가 어떤 판단을 할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며 “지역 의대 신설이 무산되지 않도록 끝까지 설득하고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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